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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요즘 어떤 평가를 받고있나요? 예전에는 폭군이다 소리 듣다고 또 어느순간 인조다음이라 재평가 받다가 다시
예전에는 폭군이다 소리 듣다고 또 어느순간 인조다음이라 재평가 받다가 다시 또 안좋은 왕이다 라는 소리 들었는데.. 호불호가 나뉘나 보네요? 
광해군 평가의 흐름
조선시대: 철저한 폭군 이미지
광해군은 **인조반정(1623년)**으로 폐위된 왕입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적인 행위였습니다.
인조를 비롯한 서인 세력은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군을 철저한 폭군으로 기록하고 평가절하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시 공식 기록에는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일제강점기 및 근대: 재평가의 시작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 근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광해군의 **실리적 외교 정책(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 외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분석이죠.
또한, 전란(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대동법 실시,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 등)도 재조명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대중적 이미지와 재반박 (현재의 논란)
2000년대 이후에는 영화, 드라마 등 대중매체를 통해 광해군이 **'개혁적인 군주', '비운의 왕'**으로 크게 부각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현실 정치와 연결시켜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친 이상적인 지도자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러한 '과도한 미화'에 대한 비판과 재반박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외교 정책의 한계: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중립 외교'라기보다는 '눈치 보기' 또는 '무책임한 회피'에 가까웠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또한, 당시 후금의 국력이 명나라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최선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 오피니언뉴스 등 일부 언론과 학자들은 광해군 중립외교론이 식민사관에서 출발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실정 논란 재부각:
폐모살제와 숙청: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위 등 윤리적 문제를 넘어선 그의 정치적 폭력성과 숙청은 여전히 부정적인 평가의 핵심입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붕당 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대북 세력의 독주를 초래했습니다.
토목 공사: 궁궐 중건 등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인해 민생을 피폐하게 했다는 비판도 다시 제기됩니다. 대동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으나, 동시에 진행된 대규모 공사가 그 효과를 상쇄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소통과 포용 부족: 아버지 선조에게 받은 상처로 인한 '왕권 노이로제'가 심해 신하들을 제대로 다독이지 못하고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결론: 호불호가 나뉘는 이유
결론적으로 광해군은 여전히 '호불호가 나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평가는 주로 **전란 후 복구 노력(대동법 등)과 실리적인 대외 정책(중립 외교)**에 초점을 맞춥니다.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윤리적 문제(폐모살제), 과도한 숙청, 무리한 토목 공사로 인한 민생 파탄, 그리고 국정 운영의 불안정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현재의 가치관과 해석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광해군 역시 단순히 '선하다' 또는 '악하다'로 규정하기 어려운,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왕으로 계속해서 연구되고 재평가될 것입니다.